모부투 세세 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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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부투 세세 세코는 1930년 벨기에령 콩고에서 태어난 콩고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1965년부터 1997년까지 자이르(구 콩고)를 통치하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랫동안 독재 정권을 유지했다. 그는 언론인, 군인으로 활동하다가 1960년 콩고의 독립과 함께 군 참모총장이 되었고, 1965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친미, 반공 정책을 펼치며 서방 국가의 지원을 받았지만, 권력 독점과 부패로 국가 재정을 탕진하고 국민을 빈곤에 빠뜨렸다. 1970년대에는 자이르화 정책을 추진하며 국명을 변경하고 문화를 개혁했으나,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으로 1990년대 초 다당제 허용 등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콩고 내전으로 권력을 잃고 망명했으며, 199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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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부투 세세 세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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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모부투 세세 세코 |
출생 이름 | 조제프-데지레 모부투 |
출생일 | 1930년 10월 14일 |
출생지 | 벨기에령 콩고 에콰퇴르 리살라 |
사망일 | 1997년 9월 7일 |
사망지 | 모로코 라바트 |
정당 | 혁명인민운동 |
배우자 | 마리-앙투아네트 그비아티브와 고그베 예테네 (1955년 결혼, 1977년 사망) 보비 라다와 (1980년 결혼) |
자녀 | 16명, 은장가, 콩굴루 포함 |
종교 | 기독교 가톨릭 |
군사 정보 | |
소속 | 콩고 공공군 프랑스어: Armée Nationale Congolaise 프랑스어: Forces Armées Zaïroises |
복무 기간 | 1949년–1997년 |
계급 | 원수 (육군) 제독 (해군) 최고사령관 (군) |
참전 전투 | 콩고 위기 샤바 침공 제1차 콩고 전쟁 |
정치 경력 | |
직책 | 자이르 대통령 |
재임 시작 | 1971년 10월 27일 |
재임 종료 | 1997년 5월 16일 |
이전 대통령 | 본인 (콩고 민주 공화국 대통령) |
다음 대통령 | 로랑데지레 카빌라 (콩고 민주 공화국 대통령) |
직책 (2) | 콩고 민주 공화국 대통령 |
재임 시작 (2) | 1965년 11월 24일 |
재임 종료 (2) | 1971년 10월 27일 |
이전 대통령 (2) | 조제프 카사부부 |
다음 대통령 (2) | 본인 (자이르 대통령) |
직책 (3) | 아프리카 통일 기구 의장 |
재임 시작 (3) | 1967년 9월 11일 |
재임 종료 (3) | 1968년 9월 13일 |
이전 의장 (3) | 하일레 셀라시에 |
다음 의장 (3) | 후아리 부메디엔 |
수상 | |
수상 내역 | File:Ribbon bar of the National Order of the Leopard (Zaire).svg File:TWN Order of Propitious Clouds 1Class BAR.svg File:Order of Isabella the Catholic - Sash of Collar.svg File:Cordone di gran Croce di Gran Cordone OMRI BAR.svg File:PRT Order of Prince Henry - Grand Collar BAR.svg File:US Legion of Merit Commander ribbon.png File:Order of the Bath UK ribbon.svg File:BWA Presidential Order of Botswana ribbon.svg File:Order of the Golden Ark.png File:25th Centennial Anniversary Medal Ribbon Bar - Imperial Iran.svg File:BEL - Order of Leopold - Grand Cordon bar.svg File:Mugunghwa order symbol.png |
기타 | |
학력 | en:Collège du Léman |
2. 어린 시절
모부투 세세 세코는 1930년 10월 14일 벨기에령 콩고 몽갈라주 리살라에서 응반디족으로 태어났으며, 출생 당시 이름은 '''조제프데지레 모부투'''(Joseph-Désiré Mobutu프랑스어)였다.[12][13] 아버지는 요리사였고[14][15] 어머니는 호텔 하녀였다.[14][15] 1938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16] 그의 어머니는 가족을 우방기주의 부계 씨족의 보호 아래 두었다. 모부투는 삼촌과 할아버지에게서 자랐다.[16]
모부투는 1956년 "de Banzy"라는 필명으로 신문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20] 군사와 저널리즘 경력을 통해 그는 자유주의적 벨기에 편집자와 상급 벨기에인 사관 마르리에르 대령 같은 권력적인 유럽의 후원자들을 찾았다. 그는 킨샤사에서 새로운 아프리카의 엘리트들 중에 전망을 얻기도 하였다. 그의 단 하나의 문제는 자신을 이성적이나 적합한 도덕성 특성들을 결핍한 타락한 젊은 남자로 숙고한 가톨릭 교회와였다. 모부투는 자신의 인생을 통하여 교회에 적대를 남겼다. 그는 자신의 부인과 가톨릭 전례의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거부하였다.[19] 군인으로서 모부투는 벨기에 식민 당국이 설립한 잡지인 『아프리카 뉴스』(Actualités Africaines)에 가명으로 당대 정치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1956년 그는 군을 떠나 전업 언론인이 되어 레오폴드빌 일간지인 『라브니르』(L'Avenir)에 글을 썼다.[20]
1960년 6월 30일 콩고의 독립이 정식으로 선언될 때 초대 대통령에 조제프 카사부부, 초대 총리에 파트리스 루뭄바가 되었다.[20] 카사부부의 바콩고 동맹당과 루뭄바의 콩고국민운동은 각각 지방 연방제와 단일 국가를 지향하며 대립하였다. 두 지도자 간의 긴장은 해소되지 않았고, 15개의 정당들이 종족의 다른 점들을 둘러싸고 주로 중심을 잡았다. 콩고는 군대가 폭동을 일으키면서 위기에 빠졌고, 루뭄바는 새로운 참모 총장으로 모부투 대령을 임명하여 군대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였다. 모부투는 폭동 진압 과정에서 군대에 영향력을 증명하였고, 폭동 이후 군 통치에 있어 빅토르 룬둘라와 경쟁 관계를 형성했다.[22] 8월까지 모부투와 루뭄바 사이에 불화가 발생했을 때, 모부투는 중앙에 위치한 육군 주둔지들에 대한 사실상의 통치권을 확보했다.
모부투는 위원 칼리지로 결성하면서 제1공화국 동안 잠시 권력을 잡았는데, 위원들의 지원은 주로 젊은 대학 졸업생들이었다. 군인이자 정치적 인물이었던 모부투는 군사 독재자가 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육군은 그의 주요 기반이었으나, 그는 복잡한 정치적 망상 조직을 지속하였고 정책을 만드는 정부에서 주요 참가자였다. 그는 1961년 8월 새로운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통치했으며, 시릴 아둘라가 총리직을 맡고, 조셉 카사부부가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새로운 정부가 형성되었다.
1965년 쿠데타 이후, 모부투는 정부의 제도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공무원들로 직위를 채웠고, 국가 원수가 되었다.[27] 그의 부하 대령 (후에 장군) 레오나르 물람바는 총리로 임명되었다. 헌법적 정면 뒤로 군인 직원은 유일한 효과적인 권한이 되었다. 모부투는 5년간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권력 장악 후 첫 연설에서 모부투는 레오폴드빌(현 킨샤사) 주 경기장에 모인 군중에게 정치인들이 5년 만에 콩고를 망쳐놓았으니, 그가 상황을 바로잡는 데에도 최소한 그만큼의 시간이 걸릴 것이며, 따라서 5년 동안 더 이상 정당 활동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55]
모부투는 권력을 잡은 후, "확실성"이라는 정치적 독트린을 만들었다. 이는 아프리카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모부투는 이념이 국가의 생존과 진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국가의 진보 없이는 사회가 방향 감각을 잃는다고 믿었다. 이러한 독트린에 따라 콩고민주공화국은 1971년 10월 27일 자이르 공화국으로 국명을 변경했다. '자이르'는 콩고강을 가리키는 포르투갈어 이름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지명은 아프리카식으로 변경되었고, 새로운 국기와 국가가 채택되었다. 개인들은 세례명이나 외국식 이름 대신 아프리카식 이름을 사용하도록 요구받았다. 모부투 자신도 "초인적 인내와 불굴의 의지로, 지나가는 발자취마다 불을 남기며,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여 전진하는 전능한 전사"를 의미하는 '모부투 세세 세코 은쿠쿠 응구벤두 와 자 방가'라는 긴 이름을 채택했다. 크리스마스 의식과 나비 넥타이 착용 등 유럽식 관습도 금지되었다.
모부투는 음반다카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18] 여러 가톨릭 선교 학교에서 잦은 징계를 받았다.[18] 그는 학교 스포츠와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학급 신문을 담당하기도 했다.[18] 191cm의 장신이었던 그는 장난기 많고 익살스러운 유머 감각으로 알려져 있었다.[18] 한 급우는 네덜란드어를 모국어로 하는 벨기에 사제들이 프랑스어에 실수를 하면 모부투가 수업 시간에 지적했다고 회상했다.[18]
1949년 모부투는 배를 타고 몰래 레오폴드빌로 가서 한 소녀를 만났고, 학년 말에 감옥 대신 식민지 군대인 공공군(Force Publique)에서 7년간 복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8] 1950년, 학적에서 불명예 퇴학 처분을 받고 벨기에령 콩고 육군에 7년 징계가 주어졌다.[18]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그는 책상 직업을 받았고, 카낭가 사관 학교로 보내져 부사관 간부 훈련을 받았다.[18] 1953년 킨샤사에 있는 육군 본부로 옮겨졌고, 1956년 콩고인에게 열린 최고 계급인 특무 상사로 전역했다.[18] 군 복무 중에는 "반자이"라는 필명으로 저널리스트 활동을 하기도 했다.
3. 신문 기자와 브뤼셀 유학 시절
1958년 모부투는 벨기에의 식민지 업적의 예들로서 브뤼셀 세계 박람회에서 전시된 콩고인들의 큰 대표단과 함께 브뤼셀로 갔다.[22] 1959년 그는 브뤼셀을 재방문하여 식민지 선전국 "인포르콩고" (Inforcongo)에서 도제 살이를 지켰다. 이 게시는 그에게 브뤼셀 유학을 위한 기회들을 주었다.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정치적으로 야망의 콩고인들은 정치적 연락망들을 건설하는 데 바빴다.
모부투는 브뤼셀에서 지속적으로 살며 갑자기 크게 나타난 초기 독립을 위한 번영으로서 벨기에에서 콩고인 국민주의자들과 연락을 만들고 있던 정보, 외교적과 재정적 이익들에 의하여 찾아졌다. 모부투는 이 시기 동안 재정가, CIA, 콩고인 학생들과 벨기에 안전군들 중에 연락들을 만들었다. 모부투는 다가오는 콩고를 위한 독립을 숙고한 브뤼셀에서 원탁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는 1957년에 시작된 파트리스 루뭄바와 우정을 개발하였고, 브뤼셀에서 MNC/L 사무소의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독립하기 3주 전에 콩고로 귀국하였다.[22]
모부투는 군 생활에서 규율을 배우고, 루이 보보조(Louis Bobozo) 상사에게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를 발견했다. 모부투는 벨기에 장교들에게서 유럽 신문을 빌리고,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책을 빌려 근무 서는 시간이나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를 계속했다. 그의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Charles de Gaulle),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철학자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였다. 회계 과정을 수료한 후, 모부투는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학교 사제들과의 충돌 이후 여전히 분노를 느끼던 그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결혼식 축하에 그가 기여한 것은 그의 군 월급으로 살 수 있었던 맥주 한 상자였다.[19]
2년 후 그는 벨기에로 가서 1958 세계 박람회를 취재했고, 그곳에 머물면서 언론인으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이 무렵 모부투는 식민 통치에 도전하는 많은 젊은 콩고 지식인들을 만났다. 그는 파트리스 루뭄바와 친분을 쌓고 루뭄바의 콩고 민족 운동(MNC)에 가입했다. 모부투는 결국 루뭄바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22]
1960년 브뤼셀에서 열린 콩고 독립에 관한 회담 중 미국 대사관은 콩고 대표단을 위한 리셉션을 열었다. 대사관 직원들은 각자 만날 대표단 구성원 명단을 받았고, 나중에 그들의 인상에 대해 논의했다. 대사는 이렇게 적었다. "한 이름이 계속해서 거론되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아무의 명단에도 없었다. 그는 공식 대표단 구성원이 아니었고, 루뭄바의 비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 사람이 매우 총명한 사람이고, 매우 젊고 미숙할 수도 있지만,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데 동의했다."[23]
4. 콩고의 독립
벨기에 문관들이 콩고를 떠나고 벨기에군이 자국민 보호를 위해 개입하는 가운데, 카탕가 주는 모이즈 촘베의 지도 아래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카사이 주 남부가 뒤따랐다. 루뭄바는 유엔과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고, 모부투를 국방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1960년 8월 모부투와 루뭄바 사이의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카사부부 대통령은 루뭄바를 총리직에서 해임했다. 루뭄바는 이에 불복하여 카사부부의 해임을 시도했으나, 9월 14일 모부투 대령의 쿠데타로 인해 정치적 혼란은 일단락되었다. 모부투는 12월 31일까지 모든 정치 제도를 중지시키고, 콩고로 초청받은 소련 및 공산국가들의 외교관과 기술자들을 추방했다. 그는 카사부부와 루뭄바 모두 중립적인 상태라고 선언하고, 자신의 권위 아래 임시 정권을 수립하였다.
쿠데타 이후, 루뭄바는 유엔의 보호 아래 있었으나, 키상가니로 탈출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카탕가 주의 적들에게 보내져 살해되었다. 모부투는 루뭄바 체포 및 이송에 책임이 있는 군인들을 지휘했기에, 루뭄바 암살에 대한 연루 의혹을 받았다. 모부투는 "카사부부가 루뭄바의 체포와 카탕가 주 루붐바시로의 이송을 명령했다. 루뭄바가 암살되었을 때 난 킨샤사에 있었으며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그의 사망 소식에 나 역시 놀랐다."라고 언급했다. 이후 모부투는 루뭄바를 국민적 영웅으로 선언하였다.
군인 시절 모부투는 벨기에 식민 당국이 설립한 잡지 『아프리카 뉴스』(Actualités Africaines)에 당대 정치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1956년 군을 떠나 전업 언론인이 되어 레오폴드빌 일간지 『라브니르』(L'Avenir)에 글을 썼다.[23] 1958년 세계 박람회 취재를 위해 벨기에에 체류하며 언론인 훈련을 받았고, 이 시기 콩고 독립을 주장하는 젊은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파트리스 루뭄바와 친분을 쌓고 콩고 민족 운동(MNC)에 가입하여 루뭄바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 당시 벨기에 정보부가 모부투를 정보원으로 포섭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1960년 브뤼셀에서 열린 콩고 독립 회담 중 미국 대사관은 콩고 대표단을 위한 리셉션을 열었는데, 대사는 모부투에 대해 "매우 총명하고 젊지만 미숙할 수 있으나,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총선 이후 루뭄바는 모부투에게 대통령 비서실장 직책을 제안했고, 모부투는 정부 구성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독립 이후 루뭄바와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1960년 6월 벨기에로부터 콩고 공화국이 독립하자 장관 보좌관으로 임명되었고, 룸붐바의 발탁으로 콩고 민주 공화국군 참모총장에 취임했다. 1960년 9월 콩고 폭동 초기의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고, 조셉 카사부부 대통령과 손을 잡고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를 체포한 것으로 미국과 관계가 깊어졌다. 1961년, 정권을 민간에 이양했다.
5. 첫 권력과 민간 정부에 이양
1960년 6월 벨기에로부터 콩고 공화국이 독립하자 장관 보좌관으로 임명되었고, 룸붐바의 발탁으로 콩고 민주 공화국군 참모총장에 취임했다. 그 후, 카탕가가 분리된 이후 콩고의 상황 악화에 따라, 1960년 9월 콩고 폭동 초기의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다. 후에 조셉 카사부부 대통령과 손을 잡고, 파트리스 룸붐바 총리를 체포한 것으로 미국과 관계가 깊어졌다. 1961년, 정권을 민간에 이양했다.
이 시기 동안 권력을 위하여 4개의 단체들 - 카사부부 아래 민간 정부, 앙투안 기젱가 아래 북부 지방들, 카탕가에서 촘베와 알베르 칼론지에 의하여 지도된 카사이 주에서 분리 단체가 우열을 다투고 있었다. 촘베를 제외한 전부는 소란스러운 2년 동안 다스린 아둘라 아래 새로운 정부를 형성하는 데 가입하였다. 1964년 7월 촘베는 총리직을 취하고, "국가 일치의 정부"로 알려진 새로운 국민 정부를 형성하는 데 촘베를 초청하였다. 8월 1일의 새 헌법은 연방주의의 조직을 합병한 대통령 제도를 설립하였다.
1960년 7월 5일, 레오폴드빌(현 킨샤사) 레오폴드 2세 캠프에 주둔한 강제 공화국군 병사들은 백인 중심의 지휘 체계와 근무 조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그 후 며칠 동안 지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모부투는 다른 관리들과 함께 반란군과 협상하여 장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석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7월 8일, 전 장관회의는 조셉 카사부부 대통령의 주재하에 레오폴드 2세 캠프에서 특별 회의를 열어 주둔군의 아프리카화 문제를 논의했다.
장관들은 누가 적절한 육군 참모총장이 될지에 대해 논의했다. 이 직책의 두 주요 후보는 청소년 체육부 장관 모리스 음폴로와 모부투였다. 전자는 반란군에 대한 영향력을 보여주었지만, 카사부부와 바콩고 장관들은 그가 권력을 잡으면 쿠데타(쿠데타)를 일으킬까 봐 우려했다. 후자는 더 차분하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룸움바는 음폴로를 용감하다고 생각했지만 모부투의 신중함을 더 선호했다. 논의가 계속되면서 내각은 참모총장으로 누구를 선호하는지에 따라 분열되기 시작했다. 룸움바는 두 사람 모두를 정부에 유지하고 그들의 지지자 진영 중 하나를 화나게 하는 것을 피하고 싶어했다. 결국 모부투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고 대령 계급을 받았다. 다음 날, 정부 대표단은 수도를 떠나 군대의 아프리카화를 감독했고, 모부투는 에콰터르로 파견되었다. 그가 그곳에 있는 동안 음폴로는 ANC 참모총장으로 활동했다. 모부투는 이러한 상황에 분개했고, 수도로 돌아와 내각 회의에서 룸움바와 대립하며 "내가 부적격자였거나, 당신이 나를 해임해야 하거나, 아니면 내가 충실히 임무를 완수했으므로 계급과 직책을 유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유엔에서 근무하는 영국 외교관 브라이언 어쿼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1960년 7월 모부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파트리스 룸움바 총리의 수석 군사 보좌관이었고, 상사에서 중령으로 진급한 직후였습니다. 그의 상사와 비교했을 때, 모부투는 실용주의와 상식의 기둥이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룸움바의 대마초에 취한 경호원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우리는 그에게 호소했습니다. 바로 그가 룸움바의 가장 터무니없는 요청 – 예를 들어 유엔이 잠재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콩고 군대의 급여를 지불해야 한다는 요청 – 을 무심한 듯한 태도로 제기했던 사람입니다. 그 초기에는 모부투는 비교적 합리적인 젊은이로 보였습니다. 적어도 때때로는 새로 독립한 자신의 국가의 최상의 이익을 마음속에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24]
부유한 콩고 광산에 대한 접근을 유지하려는 벨기에 정부의 부추김으로 남부에서 분리주의 폭력이 발생했다. 질서 회복을 돕기 위해 파견된 유엔군이 분리주의자들을 진압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우려한 룸움바는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6주 만에 대규모 군사 지원과 약 1,000명의 소련 기술 고문을 받았다. 이는 냉전 중이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소련의 활동이 중앙 아프리카에 공산주의 영향력을 확산하려는 책략이라고 우려했다. 카사부부는 미국과 벨기에의 부추김으로 9월 5일 룸움바를 해임했다. 분노한 룸움바는 카사부부가 폐위되었다고 선언했다. 의회는 해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화해를 촉구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룸움바와 카사부부는 모두 모부투에게 상대방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모부투는 여러 출처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았다. 병사들의 급여를 지불하는 데 도움을 준 서방 국가들의 대사관과 카사부부, 모부투의 부하들은 모두 소련의 존재를 없애는 것을 선호했다. 9월 14일 모부투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카사부부와 룸움바 모두를 "중립화"시키고 대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새로운 정부인 총재 위원회를 수립했다. 룸움바는 이 행동을 거부했지만 거주지로 은퇴해야 했고, 유엔 평화유지군은 모부투의 병사들이 그를 체포하는 것을 막았다. 어쿼트는 쿠데타 당일 모부투가 레오폴드빌 유엔 본부에 예고 없이 나타나 라디오에서 쿠데타를 발표할 때까지 떠나지 않고, 모부투가 계속해서 "''C'est moi!''"("바로 나다!")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24] 쿠데타가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 모부투가 유엔 본부에 간 것임을 알고 어쿼트는 그를 내쫓았다.[24]
국제 사회가 자신의 복귀를 지지할 것이라는 확신을 잃은 룸움바는 11월 말 스탠리빌에 있는 지지자들에게 합류하여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도망쳤다. 그는 12월 초 모부투의 군대에 체포되어 티스빌에 있는 그의 본부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모부투는 그를 여전히 위협으로 여겼고, 1961년 1월 17일 반란을 일으킨 카탕가 주로 그를 이송했다. 룸움바는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중에 모부투 정부가 그를 넘겨준 후 모이즈 촘베의 분리주의 세력에 의해 같은 날 처형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25]
1961년 1월 23일, 카사부부는 모부투를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역사가 드 위트는 이것이 "군대, 즉 대통령의 유일한 지원과 군대 내에서 모부투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라고 주장한다.[26]
1964년 피에르 뮬렐레가 다른 반란을 이끌었다. 그들은 콩고의 3분의 2를 신속하게 점령했다. 이에 대응하여 모부투가 이끄는 콩고군은 1965년까지 전 영토를 재정복했다.
6. 쿠데타를 이끌며
1965년 11월 30일 의회는 대부분의 입법권을 모부투와 그의 내각에 넘기는 법안을 승인했지만, 그의 법령을 검토할 권리는 유지했다. 1966년 3월 초 그는 의회의 검토 권한을 폐지한다고 선언하며 새로운 의회 회기를 열었고, 2주 후 그의 정부는 의회를 영구적으로 해산하고 남은 모든 기능을 장악했다.[29]
모부투의 대통령직의 첫 5년은 그의 지배들과 직무로 들어가는 권력의 합동을 보였다. 가상 무정부 상태의 6년 후, 모부투는 자이르에 어떤 법률과 질서를 가져오는 데 성공하였다. 그가 드디어 국가 원수가 되었을 때 그는 "5년 동안 국가에서 아무 정당 정치들도 실현되려고 하지 않았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1966년 4월 혁명대중운동의 창립 총재가 되었다. 혁명대중운동은 국가의 유일한 법률 정당이었고, 법률에 의하여 차라리 모든 시민이 당원이었다.
초기 모부투 정부는 비정치적이거나 심지어 반정치적인 모습을 보였다. "정치인"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녔고, 악당이나 부패한 사람과 거의 동의어가 되었다. 1966년에는 공화국 자원봉사단이 설립되었는데, 이는 룸바움바 다음으로 국가의 "제2의 영웅"으로 선포된 모부투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결집하기 위한 선봉대 운동이었다. 룸바움바 축출에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부투는 자신을 룸바움바 유산의 계승자로 내세우려 했다. 그의 초기 통치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진정한 콩고 민족주의"였다.
1967년에는 혁명 인민 운동(MPR)이 등장했는데, 이는 1990년까지 국가의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다. MPR 강령인 N'Sele 선언에서 제시된 주제에는 민족주의, 혁명, "진정성"이 있었다. 혁명은 "본질적으로 실용적인 진정한 국가 혁명"으로 묘사되었으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의 거부"를 요구했다. MPR의 슬로건 중 하나는 "좌도 우도 아니다"였으며, 후년에는 "중도도 아니다"가 추가되었다. 같은 해 모든 노동 조합은 단일 노조인 자이르 노동자 연합으로 통합되었고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모부투는 노조가 독립적인 단체가 아니라 정부 정책을 지지하는 도구로 기능하기를 원했다. 독립 노동 조합은 1991년까지 불법이었다.
초기 통치 기간 동안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던 모부투는 후원을 통해 많은 반대 세력을 복종시켰다. 회유할 수 없는 세력은 강력하게 제압했다. 1966년에는 쿠데타 시도 공모 혐의로 내각 장관 4명이 체포되어 군사 재판을 받고 5만 명 이상이 지켜보는 야외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전 카탕가 헌병대의 봉기는 진압되었고, 백인 용병들이 이끄는 스탠리빌 반란(1967년)도 진압되었다.[30]
1970년까지 그의 권위에 대한 거의 모든 잠재적 위협은 제거되었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법과 질서는 회복되었다. 그 해는 모부투의 정통성과 권력의 정점을 찍었다. 같은 해 대통령 및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모부투는 유일한 후보였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모부투는 1,013만 1,669표를 얻어 157표의 "반대"표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31] 나중에 실제 등록 유권자 수보다 약 3만 500표가 더 많이 투표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32][33] 의회 선거도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유권자들에게 MPR의 단일 명단이 제시되었고, 공식 집계에 따르면 믿기 어려운 98.33%의 유권자가 MPR 명단에 찬성표를 던졌다.
1971년부터 국명을 "콩고"에서 "자이르"로, 수도의 프랑스어 명칭인 "레오폴드빌"을 "킨샤사"로 개칭하는 등 민족주의적인 "자이르화 정책"을 추진했다. 1972년에 자신의 이름도 "'''모부투 세세 세코'''"로 개명했다.
7. 이행된 모부투주의
공식 이념은 '''"모부투주의"'''로 불렸으며, 1974년까지 학교에서 종교적 지시 대신 가르쳐졌다. 모부투의 추종자들은 그를 "메시아"로 칭송했고, 혁명인민운동은 교회와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마오쩌둥주의의 영향을 받아, 모부투는 "자이르 혁명의 안내자", "국가의 아버지", "창립 대통령" 등의 칭호로 공식 매체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모부투는 자신의 경력과 관련된 마을들을 "심사 숙고의 장소"로 지정하기도 했다. 1971년 모부투의 모친 사망 이후, 그의 개인 숭배는 절정에 달했다. 모부투는 그녀의 이름을 딴 새로운 의료 시설을 킨샤사에 설립했다.
1974년에서 1975년 사이에 모부투에 대한 개인 숭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출판물들은 거의 매일 그의 사진을 첫 페이지에 실었고, 다른 공무원들은 이름 대신 직함으로만 언급되었다.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모부투는 자이르 국민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즐겼다. 그의 개인주의 브랜드는 대중이 추상적인 용어로 권력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정당화되었다. 완전한 합법성을 얻기 위해 국가는 마을 주민들을 대표하는 마을 촌장처럼 개인화되어야 했다.
1966년 6월 1일부터 모부투는 “오텐티시테”라는 친아프리카 문화 인식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식민지 시대 명칭을 반영하는 도시 이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레오폴드빌은 킨샤사로, 엘리자베스빌은 루붐바시로, 스탠리빌은 키산가니로 개명되었다. 1971년 10월, 그는 국가 이름을 자이르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유럽식 이름을 아프리카식 이름으로 바꾸라고 명령했고, 사제들은 자이르 아이에게 유럽식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다 적발되면 5년의 징역형에 처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서구식 의복과 넥타이가 금지되었고, 남성들은 “아바코스트”(à bas le costume, 즉 "정장을 없애라"의 약자)라고 알려진 마오식 튜닉을 강제로 착용해야 했다.
1972년, 모부투는 자신의 이름을 "모부투 세세 세코 응쿠쿠 음벤두 와 자 방가"로 바꾸었다. 이 시기에 그는 군복 대신 아바코스트, 두꺼운 뿔테 안경, 표범 가죽 모자, 지팡이를 든 모습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변화시켰다.
1974년, 새로운 헌법은 모부투의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이 헌법은 MPR을 국가의 "유일한 기관"으로 정의했으며, 사실상 국가는 당의 전달 수단이었다. 모든 시민은 출생 시 자동으로 MPR 회원이 되었다. 헌법은 MPR이 당 대통령을 통해 구현되며, 당 대통령은 7년마다 선출되고 동시에 공화국 대통령 후보로 자동 지명되어 국민투표로 확정된다고 명시했다. 이 문서는 모부투에게 "권력 행사의 충만함"을 부여하여 사실상 모든 통치 권력을 그의 손에 집중시켰다. 모부투는 이 체제 하에서 세 번 재선되었고, 매번 98% 이상이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MPR 후보 단일 명단은 5년마다 의회에 제출되었고, 거의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았다. 1975년 선거에서는 공식 투표가 생략되고, 후보자들은 전국 각지의 공공 장소에서 박수를 받으며 선출되었다.
모부투는 초기 집권 기간 동안 정적, 분리주의자, 쿠데타 음모자 등을 공개 처형하여 권력을 강화했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 총리 에바리스테 킴바와 세 명의 각료는 쿠데타 혐의로 1966년 5월 재판을 받고 5월 30일 5만 명의 관중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8년, 피에르 뮬렐레는 사면을 약속받고 망명에서 돌아왔으나, 모부투의 군대에 의해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
이후 모부투는 정적을 매수하는 전술로 전환했다. 그는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두어라"는 슬로건으로 자신의 전술을 설명했다. 그는 "의자 바꿔앉기" 전술로 정부 구성원들을 순환시키고 내각 명단을 끊임없이 바꿔 아무도 자신의 통치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했다. 1965년 11월부터 1997년 4월까지 모부투는 60번이나 내각을 개편했다. 잦은 내각 개편은 장관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부패를 조장했다. 또 다른 전술은 정부의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 고문 후 사면하고 고위직에 임명하는 것이었다. 콩고 역사학자 에미제트 F. 키산가니는 모부투가 제도적 부패 시스템을 만들어 공공 도덕을 크게 저하시켰다고 평가했다. 1970년 초 모부투는 국가 예산의 60%를 훔친 것으로 추산된다.
1972년 모부투는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83년 6월 그는 자신을 원수로 승진시켰다.
모부투는 콩고 자원의 수익을 얻기 위해 외국 소유 기업을 국유화하고 유럽 투자자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는 이러한 회사의 경영권을 친척과 측근들에게 넘겼고, 이들은 곧 부패를 통해 회사 자산을 훔쳤다. 1973년~1974년에 모부투는 "자이르화" 운동을 시작하여 외국 소유 기업을 국유화했다. 1973년 10월, 석유 위기로 세계 경제가 침체되고 구리 가격이 폭락하면서 자이르는 큰 타격을 입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토마스 오돔은 구리 가격 폭락으로 자이르가 1974년 "하룻밤 사이에 번영에서 파산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했다. 경제 붕괴로 자이르는 IMF에 의존해야 했다. 모부투는 1974년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의 영향을 받아 "자이르 혁명을 과격화"할 의도를 발표했다. 모부투가 넘긴 기업들은 국유화되어 국가 통제하에 놓였다. 동시에 모부투는 공무원의 급여를 50% 삭감했는데, 이는 1975년 6월 쿠데타 시도로 이어졌다.
1977년까지 모부투의 국유화는 심각한 경제 불황을 초래하여 외국 투자자들을 다시 유치해야 했다. 카탕가 반군이 자이르를 침공하자, 프랑스는 모로코 공수부대를 지원하여 반군을 물리치고 샤바 1차 전쟁을 종식시켰다. 반군은 1978년 샤바 2차 전쟁에서 다시 자이르를 공격했고, 벨기에와 프랑스 정부는 미국 지원을 받아 군대를 배치하여 반군을 물리쳤다. 두 차례의 샤바 침공에서 자이르군의 부진은 모부투로 하여금 외국군에 의존하게 만들었지만, 군 개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모부투는 1978년 5만 1,000명이었던 육군 규모를 1980년 2만 3,000명으로 감축했다. 1980년까지 자이르군의 약 90%가 응반디족이었다. 모부투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대는 이스라엘 훈련을 받은 특별 대통령 부대였다.
모부투는 1977년 자이르 대통령 선거와 1984년 자이르 대통령 선거에서 단일 후보로 재선되었다. 그는 자신의 사적인 재산을 늘리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1988년에는 최소 5,000만 달러에 달했다. 그는 그 대부분을 스위스 은행에 보관했다. 1976년 5월 20일 연설에서 모부투는 사소한 부패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며 "훔치고 싶다면 좋게 조금 훔치세요.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부자가 되려고 너무 많이 훔치면 잡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989년 정부는 벨기에로부터의 국제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했다.
모부투는 메르세데스-벤츠 차량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국가의 도로는 악화되었고 국민들은 굶주렸다. 사회기반시설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많은 공무원들이 수개월 동안 임금을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돈은 모부투와 그의 측근들에게 돌아갔다. 특별 대통령 부대만이 적절한 임금을 받았다. "공무원들은 일하는 척했고, 국가는 급여를 주는 척했다"는 속담이 이러한 현실을 표현했다. 자이르군은 불규칙적인 급여, 열악한 환경, 부패한 장교단으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었다. FAZ 병사들은 민간인을 약탈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모부투 통치의 반복적인 특징은 FAZ의 도로 검문소였다.
모부투의 경제적 실정은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급여의 실질 가치가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공무원들 사이에서 부패 문화가 조장되었다.
모부투는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으로 유명했다. 그는 자신의 요트 ''카마뇨라''를 타고 콩고 강을 순항했다. 가바돌리테에는 "정글의 베르사유 궁전"이라는 궁전을 세웠다. 파리에서 쇼핑을 하기 위해 에어프랑스로부터 콩코드를 전세했다. 그는 가바돌리테 공항을 건설했다. 1989년 모부투는 콩코드 항공기 F-BTSD를 전세했다.
모부투의 통치는 권력 독점과 친족 편애의 사례 중 하나로 명성을 얻었다. 응반디 부족의 가까운 친척과 동족들에게 군과 정부의 고위직을 부여했고, 장남인 니와를 후계자로 키웠으나, 니와는 1994년 에이즈로 사망했다.
모부투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독재 정권 중 하나를 이끌었고, 국민들은 빈곤 속에 살면서 국가의 천연자원을 판매하여 5,000만 달러가 넘는 사재를 축적했다. 그는 전제 정권을 수립하고, 벨기에 문화적 영향을 제거하려고 시도했으며, 반공주의 입장을 유지했다.
모부투는 인격숭배의 대상이었다. 저녁 뉴스는 그가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모습으로 시작했다. 그의 초상화는 많은 공공 장소에 걸렸고, 정부 관계자들은 그의 초상화가 새겨진 라펠 핀을 착용했다. 그는 "국부", "메시아" 등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위 워 킹스에서 선수들을 맞이하는 무용수들은 "세세 세코, 세세 세코"라고 외쳤다. 1975년 초 언론은 모부투 외에는 아무도 이름으로 언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모부투는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냉전 긴장을 성공적으로 이용했다. 그는 서방과 IMF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았다.
1965년 11월 24일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취임한 모부투는 헌법을 무효화하고 야당을 불법화하여 혁명인민운동(MPR) 일당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모이즈 쇽베는 망명 중이던 1967년 결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6월, 쇽베가 탑승한 비행기가 납치되어 알제리에 감금되었고, 1969년 사망했다. 모부투 정권에 불만을 느낀 카탕가 헌병대와 전 외인 용병 부대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콩고 국내의 유니온 미니에르를 국유화하는 자원 민족주의를 실시했다.
대외적으로는 냉전을 이용하여 친미, 반공 진영으로서 서방 국가로부터 지원금을 독점적으로 받았으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미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원조를 받았다. 그의 권력 기반은 광산 회사의 이익에 의존했는데, 스위스, 케이맨 제도 등의 비밀 은행 계좌가 용이하게 했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의 자금도 모부투를 지지했고, 그 융자와 원조는 빈곤층을 돕지 못하고 대외 채무를 심화시켰다. 모부투의 부정 축재는 총액 약 50억 달러로 추정되며, 서유럽 여러 국가 등에 호화 별장과 저택을 소유하고, 숨겨진 은행 계좌를 개설했다. "모부투의 개인 자산은 자이르 공화국의 대외 채무와 같다"라는 말이 있었다. 국내에는 전용 비행장이 있는 거대한 궁전을 건설했다. 이 궁전은 "정글의 베르사유 궁전"이라고 불렸다. TIME에서는 "아프리카 독재자의 전형"이라고 평가했다.
1971년부터 국명을 "콩고"에서 "자이르"로, 수도를 "킨샤사"로 개칭하는 등 민족주의적인 "자이르화 정책"을 추진했다. 1972년에 자신의 이름도 "모부투 세세 세코"로 개명했다. 1972년 타이완과 국교를 단절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에 접근하기 시작했고, 중소 대립을 일으키고 있던 중국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았다. 킨샤사 인민궁전과 스타드 드 마르티르도 중국의 원조로 건설되었다. 일본의 원조로 마타디 다리도 건설되었다. 서양식 양복과 넥타이를 금지하고, 아바코스트라고 불리는 인민복과 같은 옷을 강제로 입히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추장을 상징하는 지팡이와 호피 무늬 모자도 애용했다. 무아마르 알 카다피를 라이벌로 여겼고, 칼리파 하프타르와 같은 반카다피 세력을 지원했으며, 차드-리비아 분쟁에서는 이센 하브레를 지원했다.
7. 1. 모부투주의와 독재 정치
모부투는 권력을 잡은 후, "확실성"이라는 정치적 독트린을 만들었다. 이는 아프리카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모부투는 이념이 국가의 생존과 진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국가의 진보 없이는 사회가 방향 감각을 잃는다고 믿었다. 이러한 독트린에 따라 콩고민주공화국은 1971년 10월 27일 자이르 공화국으로 국명을 변경했다. '자이르'는 콩고강을 가리키는 포르투갈어 이름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지명은 아프리카식으로 변경되었고, 새로운 국기와 국가가 채택되었다. 개인들은 세례명이나 외국식 이름 대신 아프리카식 이름을 사용하도록 요구받았다. 모부투 자신도 "초인적 인내와 불굴의 의지로, 지나가는 발자취마다 불을 남기며,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여 전진하는 전능한 전사"를 의미하는 '모부투 세세 세코 은쿠쿠 응구벤두 와 자 방가'라는 긴 이름을 채택했다. 크리스마스 의식과 나비 넥타이 착용 등 유럽식 관습도 금지되었다.
공식 이념은 '''"모부투주의"'''로 불렸으며, 1974년까지 학교에서 종교적 지시 대신 가르쳐졌다. 모부투의 추종자들은 그를 "메시아"로 칭송했고, 혁명대중운동은 교회와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마오쩌둥주의의 영향을 받아, 모부투는 "자이르 혁명의 안내자", "국가의 아버지", "창립 대통령" 등의 칭호로 공식 매체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모부투는 자신의 경력과 관련된 마을들을 "심사 숙고의 장소"로 지정하기도 했다. 1971년 모부투의 모친 사망 이후, 그의 개인 숭배는 절정에 달했다. 모부투는 그녀의 이름을 딴 새로운 의료 시설을 킨샤사에 설립했다.
1974년에서 1975년 사이에 모부투에 대한 개인 숭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출판물들은 거의 매일 그의 사진을 첫 페이지에 실었고, 다른 공무원들은 이름 대신 직함으로만 언급되었다.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모부투는 자이르 국민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즐겼다. 그의 개인주의 브랜드는 대중이 추상적인 용어로 권력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정당화되었다. 완전한 합법성을 얻기 위해 국가는 마을 주민들을 대표하는 마을 촌장처럼 개인화되어야 했다.
1966년 6월 1일부터 모부투는 “오텐티시테”라는 친아프리카 문화 인식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식민지 시대 명칭을 반영하는 도시 이름을 바꾸기 시작했다.[34] 레오폴드빌은 킨샤사로, 엘리자베스빌은 루붐바시로, 스탠리빌은 키산가니로 개명되었다. 1971년 10월, 그는 국가 이름을 자이르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유럽식 이름을 아프리카식 이름으로 바꾸라고 명령했고, 사제들은 자이르 아이에게 유럽식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다 적발되면 5년의 징역형에 처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34][35] 서구식 의복과 넥타이가 금지되었고, 남성들은 “아바코스트”(à bas le costume, 즉 "정장을 없애라"의 약자)라고 알려진 마오식 튜닉을 강제로 착용해야 했다.[35]
1972년, 모부투는 자신의 이름을 "모부투 세세 세코 응쿠쿠 음벤두 와 자 방가"로 바꾸었다.[36][37] 이 시기에 그는 군복 대신 아바코스트, 두꺼운 뿔테 안경, 표범 가죽 모자, 지팡이를 든 모습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변화시켰다.
1974년, 새로운 헌법은 모부투의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이 헌법은 MPR을 국가의 "유일한 기관"으로 정의했으며, 사실상 국가는 당의 전달 수단이었다. 모든 시민은 출생 시 자동으로 MPR 회원이 되었다. 헌법은 MPR이 당 대통령을 통해 구현되며, 당 대통령은 7년마다 선출되고 동시에 공화국 대통령 후보로 자동 지명되어 국민투표로 확정된다고 명시했다. 이 문서는 모부투에게 "권력 행사의 충만함"을 부여하여 사실상 모든 통치 권력을 그의 손에 집중시켰다. 모부투는 이 체제 하에서 세 번 재선되었고, 매번 98% 이상이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MPR 후보 단일 명단은 5년마다 의회에 제출되었고, 거의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았다. 1975년 선거에서는 공식 투표가 생략되고, 후보자들은 전국 각지의 공공 장소에서 박수를 받으며 선출되었다.
모부투는 초기 집권 기간 동안 정적, 분리주의자, 쿠데타 음모자 등을 공개 처형하여 권력을 강화했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 총리 에바리스테 킴바와 세 명의 각료는 쿠데타 혐의로 1966년 5월 재판을 받고 5월 30일 5만 명의 관중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38] 1968년, 피에르 뮬렐레는 사면을 약속받고 망명에서 돌아왔으나, 모부투의 군대에 의해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39]
이후 모부투는 정적을 매수하는 전술로 전환했다. 그는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두어라"는 슬로건으로 자신의 전술을 설명했다.[40] 그는 "의자 바꿔앉기" 전술로 정부 구성원들을 순환시키고 내각 명단을 끊임없이 바꿔 아무도 자신의 통치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했다. 1965년 11월부터 1997년 4월까지 모부투는 60번이나 내각을 개편했다. 잦은 내각 개편은 장관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부패를 조장했다. 또 다른 전술은 정부의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 고문 후 사면하고 고위직에 임명하는 것이었다. 콩고 역사학자 에미제트 F. 키산가니는 모부투가 제도적 부패 시스템을 만들어 공공 도덕을 크게 저하시켰다고 평가했다. 1970년 초 모부투는 국가 예산의 60%를 훔친 것으로 추산된다.
1972년 모부투는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41] 1983년 6월 그는 자신을 원수로 승진시켰다.[42]
모부투는 콩고 자원의 수익을 얻기 위해 외국 소유 기업을 국유화하고 유럽 투자자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는 이러한 회사의 경영권을 친척과 측근들에게 넘겼고, 이들은 곧 부패를 통해 회사 자산을 훔쳤다. 1973년~1974년에 모부투는 "자이르화" 운동을 시작하여 외국 소유 기업을 국유화했다. 1973년 10월, 1973년 석유 위기로 세계 경제가 침체되고 구리 가격이 폭락하면서 자이르는 큰 타격을 입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토마스 오돔은 구리 가격 폭락으로 자이르가 1974년 "하룻밤 사이에 번영에서 파산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했다. 경제 붕괴로 자이르는 IMF에 의존해야 했다. 모부투는 1974년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의 영향을 받아 "자이르 혁명을 과격화"할 의도를 발표했다. 모부투가 넘긴 기업들은 국유화되어 국가 통제하에 놓였다. 동시에 모부투는 공무원의 급여를 50% 삭감했는데, 이는 1975년 6월 쿠데타 시도로 이어졌다.
1977년까지 모부투의 국유화는 심각한 경제 불황을 초래하여 외국 투자자들을 다시 유치해야 했다.[43] 카탕가 반군이 자이르를 침공하자, 프랑스는 모로코 공수부대를 지원하여 반군을 물리치고 샤바 1차 전쟁을 종식시켰다. 반군은 1978년 샤바 2차 전쟁에서 다시 자이르를 공격했고, 벨기에와 프랑스 정부는 미국 지원을 받아 군대를 배치하여 반군을 물리쳤다. 두 차례의 샤바 침공에서 자이르군의 부진은 모부투로 하여금 외국군에 의존하게 만들었지만, 군 개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모부투는 1978년 5만 1,000명이었던 육군 규모를 1980년 2만 3,000명으로 감축했다. 1980년까지 자이르군의 약 90%가 응반디족이었다. 모부투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대는 이스라엘 훈련을 받은 특별 대통령 부대였다.
모부투는 1977년 자이르 대통령 선거와 1984년 자이르 대통령 선거에서 단일 후보로 재선되었다. 그는 자신의 사적인 재산을 늘리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1988년에는 최소 5,000만 달러에 달했다.[44] 그는 그 대부분을 스위스 은행에 보관했다.[45] 1976년 5월 20일 연설에서 모부투는 사소한 부패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며 "훔치고 싶다면 좋게 조금 훔치세요.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부자가 되려고 너무 많이 훔치면 잡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989년 정부는 벨기에로부터의 국제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했다.
모부투는 메르세데스-벤츠 차량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국가의 도로는 악화되었고 국민들은 굶주렸다. 사회기반시설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많은 공무원들이 수개월 동안 임금을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돈은 모부투와 그의 측근들에게 돌아갔다. 특별 대통령 부대만이 적절한 임금을 받았다. "공무원들은 일하는 척했고, 국가는 급여를 주는 척했다"는 속담이 이러한 현실을 표현했다.[46] 자이르군은 불규칙적인 급여, 열악한 환경, 부패한 장교단으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었다. FAZ 병사들은 민간인을 약탈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모부투 통치의 반복적인 특징은 FAZ의 도로 검문소였다.
모부투의 경제적 실정은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급여의 실질 가치가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공무원들 사이에서 부패 문화가 조장되었다.
모부투는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으로 유명했다. 그는 자신의 요트 ''카마뇨라''를 타고 콩고 강을 순항했다. 가바돌리테에는 "정글의 베르사유 궁전"이라는 궁전을 세웠다.[47] 파리에서 쇼핑을 하기 위해 에어프랑스로부터 콩코드를 전세했다. 그는 가바돌리테 공항을 건설했다.[48] 1989년 모부투는 콩코드 항공기 F-BTSD를 전세했다.[49]
모부투의 통치는 권력 독점과 친족 편애의 사례 중 하나로 명성을 얻었다.[50] 응반디 부족의 가까운 친척과 동족들에게 군과 정부의 고위직을 부여했고, 장남인 니와를 후계자로 키웠으나, 니와는 1994년 에이즈로 사망했다.[51][52]
모부투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독재 정권 중 하나를 이끌었고, 국민들은 빈곤 속에 살면서 국가의 천연자원을 판매하여 5,000만 달러가 넘는 사재를 축적했다.[53][54] 그는 전제 정권을 수립하고, 벨기에 문화적 영향을 제거하려고 시도했으며, 반공주의 입장을 유지했다.[55][56]
모부투는 인격숭배의 대상이었다. 저녁 뉴스는 그가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모습으로 시작했다. 그의 초상화는 많은 공공 장소에 걸렸고, 정부 관계자들은 그의 초상화가 새겨진 라펠 핀을 착용했다. 그는 "국부", "메시아" 등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위 워 킹스에서 선수들을 맞이하는 무용수들은 "세세 세코, 세세 세코"라고 외쳤다. 1975년 초 언론은 모부투 외에는 아무도 이름으로 언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57][58]
모부투는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냉전 긴장을 성공적으로 이용했다. 그는 서방과 IMF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았다.[59]
1965년 11월 24일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취임한 모부투는 헌법을 무효화하고 야당을 불법화하여 혁명인민운동(MPR) 일당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115] 모이즈 쇽베는 망명 중이던 1967년 결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6월, 쇽베가 탑승한 비행기가 납치되어 알제리에 감금되었고, 1969년 사망했다. 모부투 정권에 불만을 느낀 카탕가 헌병대와 전 외인 용병 부대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콩고 국내의 유니온 미니에르를 국유화하는 자원 민족주의를 실시했다.[115]
대외적으로는 냉전을 이용하여 친미, 반공 진영으로서 서방 국가로부터 지원금을 독점적으로 받았으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미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원조를 받았다.[116] 그의 권력 기반은 광산 회사의 이익에 의존했는데, 스위스, 케이맨 제도 등의 비밀 은행 계좌가 용이하게 했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의 자금도 모부투를 지지했고, 그 융자와 원조는 빈곤층을 돕지 못하고 대외 채무를 심화시켰다.[117] 모부투의 부정 축재는 총액 약 50억 달러로 추정되며, 서유럽 여러 국가 등에 호화 별장과 저택을 소유하고, 숨겨진 은행 계좌를 개설했다. "모부투의 개인 자산은 자이르 공화국의 대외 채무와 같다"라는 말이 있었다. 국내에는 전용 비행장이 있는 거대한 궁전을 건설했다. 이 궁전은 "정글의 베르사유 궁전"이라고 불렸다.[118] TIME에서는 "아프리카 독재자의 전형"이라고 평가했다.[119]
1971년부터 국명을 "콩고"에서 "자이르"로, 수도를 "킨샤사"로 개칭하는 등 민족주의적인 "자이르화 정책"을 추진했다.[115] 1972년에 자신의 이름도 "모부투 세세 세코"로 개명했다. 1972년 타이완과 국교를 단절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에 접근하기 시작했고,[120] 중소 대립을 일으키고 있던 중국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았다.[121][122][123] 킨샤사 인민궁전과 스타드 드 마르티르도 중국의 원조로 건설되었다.[124][125][126][127][128] 일본의 원조로 마타디 다리도 건설되었다. 서양식 양복과 넥타이를 금지하고, 아바코스트라고 불리는 인민복과 같은 옷을 강제로 입히기 시작했다.[129] 아프리카 추장을 상징하는 지팡이와 호피 무늬 모자도 애용했다. 무아마르 알 카다피를 라이벌로 여겼고,[130] 칼리파 하프타르와 같은 반카다피 세력을 지원했으며,[131] 차드-리비아 분쟁에서는 이센 하브레를 지원했다.[132][133][134]
8. 부패로 표시된 정부
모부투의 통치 기간 동안 권력은 무소불위로 집중되었으며, 이는 부패와 반대파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그는 대통령 초기부터 정치인, 학생, 노동계, 가톨릭 교회 등 각계각층의 반대에 직면했지만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모부투는 대중매체를 "대중을 교육시키는 최선의 수단"으로 간주하며 정보의 흐름을 통제했다.
포브스의 1985년 기사에 따르면, 모부투의 개인 재산은 자이르 국가 빚과 맞먹는 5억 달러로 추정되었다. 그는 국가 예산의 17~20%를 "대통령직 서비스" 명목으로 유용했으며, 킨샤사 은행의 최대 주주이자 여러 외국 기업의 자이르 지사에 간접 이자를 보유하고, 국가 최대 고용주 중 하나인 농업 복합 기업 (CELZA)의 지분을 소유했다.
1990년, 동유럽 민주화의 영향으로 자이르 내 긴장이 고조되었다. 2월에는 불법 야당 (UDPS)이 루뭄바 사망 기념 시위를 벌였고, 4월에는 킨샤사에서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모부투는 다당제를 허용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1년 간의 전환 기간을 거친 후 3개의 정당만 허용하는 제한적인 조치였다.
모부투의 통치는 국민의 삶을 갉아먹는 도둑정치(kleptocracy)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대략 50억 달러를 부정 축재했으며, 서아프리카, 브라질, 모로코 등지에 호화 별장과 대저택을 보유하고, 검은 돈을 은닉하기 위한 은행 계좌를 개설했다.
모부투는 초기 집권기에 정적, 분리주의자, 쿠데타 음모자 등을 공개 처형하여 권력을 공고히 했다.[38] 1966년 5월에는 전 총리 에바리스테 킴바를 포함한 4명의 각료가 5만 명의 관중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38] 모부투는 이러한 처형에 대해 "체제 규율을 확립하기 위한 본보기"였다고 설명했다.[38]
1968년에는 피에르 뮬렐레가 사면을 약속받고 망명에서 돌아왔으나, 모부투 군대에 의해 잔혹하게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39] 이후 모부투는 정적을 매수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전환했다.[40] 그는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두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매수를 통해 정적을 포섭했다.[40] 또한 "의자 바꿔앉기" 전술을 통해 정부 구성원을 끊임없이 교체하여 누구도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지 못하도록 했다. 잦은 내각 개편은 장관들 사이에 불안감을 조성했고, 이는 심각한 부패를 조장했다.
모부투는 제도적 부패 시스템을 구축하여 공공 도덕을 크게 훼손했다. 1970년대 초, 그는 국가 예산의 60%를 횡령하여 아프리카와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972년, 모부투는 종신 대통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41] 1983년 6월에는 원수로 자신을 승진시켰다.[42]
모부투는 콩고 자원을 이용하여 외국 기업을 국유화하고 유럽 투자자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는 이러한 기업의 경영권을 친척과 측근에게 넘겨 부패를 심화시켰다. 1973년~1974년에는 "자이르화" 운동을 통해 외국 소유 기업을 국유화했다. 1973년 1973년 석유 위기로 인한 세계 경제 불황과 구리 가격 폭락은 자이르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자이르는 국제통화기금(IMF)에 의존하게 되었고, 모부투는 중국을 방문하여 좌파적 정책을 표방하며 "자이르 혁명"을 과격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1975년에는 쿠데타 시도가 발생했다.
1977년, 앙골라에 기반을 둔 카탕가 반군이 자이르를 침공하면서 샤바 1차 전쟁이 발발했다.[43] 프랑스와 모로코 군대의 도움으로 반군은 격퇴되었지만, 1978년 샤바 2차 전쟁이 다시 발생했다.[43] 벨기에와 프랑스 군대가 다시 개입하여 반군을 물리쳤다.[43] 두 차례의 샤바 침공은 모부투에게 굴욕적인 사건이었지만, 군 개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모부투는 군 규모를 감축하고, 자신의 부족인 응반디족 중심으로 군을 재편했다.
모부투는 1977년 자이르 대통령 선거와 1984년 자이르 대통령 선거에서 단독 후보로 재선되었다.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국가 재산을 탕진했는데, 1988년에는 그의 재산이 최소 5천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44] 그는 스위스 은행에 재산을 은닉했지만, 축출 후 발견된 금액은 340만 달러에 불과했다.[45]
모부투는 국가 기반 시설을 방치하고 국민들을 빈곤에 빠뜨렸다.[46] 공무원들은 수개월 동안 임금을 받지 못했고, 특별 대통령 부대만이 제대로 된 급여를 받았다.[46] 자이르군은 약탈과 부패로 악명을 떨쳤다. 모부투 정권의 경제 실정은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이는 공무원들의 부패를 더욱 심화시켰다.
모부투는 가바돌리테에 "정글의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하고, 콩코드 여객기를 전세 내어 파리에서 쇼핑을 하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47] 가바돌리테 공항은 콩코드 이착륙을 위해 확장되었다.[48]
모부투의 통치는 권력 독점과 친족 편애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힌다.[50] 그는 가까운 친척과 응반디족에게 군과 정부의 요직을 맡겼고, 장남 니와를 후계자로 키웠으나, 니와는 1994년 에이즈로 사망했다.[51] [52]
모부투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장기간 집권한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국민을 빈곤에 빠뜨리고 국가 자원을 횡령하여 5천만 달러 이상의 재산을 축적했다.[53] [54] 그는 인권 침해를 자행하고 전제 정권을 수립했으며, 반공주의 입장을 유지하며 국제적인 지지를 얻었다.[55] [56]
모부투는 인격 숭배의 대상이었다. 저녁 뉴스는 그가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모습으로 시작했고, 그의 초상화는 공공장소에 걸렸으며, 정부 관계자들은 그의 초상화가 새겨진 배지를 착용했다. 그는 "국부", "메시아", "혁명의 지도자" 등 다양한 칭호를 사용했다. 1975년 초, 언론은 모부투 외에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57] [58]
모부투는 냉전 시기 서방 국가들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았다.[59]
뉴욕 타임스는 모부투의 통치를 "폭력, 교활함, 국가 자금을 이용한 정적 매수"로 요약하며, 그의 체계적인 국가 재산 약탈은 "권력 횡령"이라는 용어를 낳았다고 평가했다.[103]
타임지는 모부투를 "전형적인 아프리카 독재자"라고 묘사했다.[11]
모부투는 수백만 달러를 횡령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104] 그는 값비싼 선물을 남발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58]
워싱턴 포스트는 모부투를 1984년 이후 세 번째로 부패한 지도자이자, 같은 기간 동안 가장 부패한 아프리카 지도자로 선정했다.[105]
모부투는 1974년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 간의 정글의 럼블 권투 시합을 유치하여 국제적인 관심과 정당성을 얻으려 했다.[106]
1965년11월 24일 쿠데타로 집권한 모부투는 헌법을 무효화하고 야당을 불법화하여 혁명인민운동(MPR) 일당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115] 모이즈 쇽베는 망명 중 결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알제리에 감금되었다가 사망했다.[115] 모부투 정권에 불만을 품은 카탕가 헌병대와 용병 부대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진압되었다.[115] 모부투는 자원 민족주의를 실시하여 유니온 미니에르를 국유화했다.[115]
모부투는 친미 반공 정책을 통해 서방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원조를 받았다.[116] 그의 권력 기반은 광산 회사 이익에 의존했으며,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자금 지원도 받았다.[117] 그러나 이러한 원조는 빈곤층에게 돌아가지 않고 대외 채무를 심화시켰다.[117] 모부투의 부정 축재는 약 50억 달러로 추정되며, 그는 서유럽, 서아프리카, 모로코, 브라질 등에 호화 별장과 저택을 소유하고 비밀 은행 계좌를 개설했다.[118]
1971년부터 모부투는 국명을 "콩고"에서 "자이르"로, 수도 이름을 "레오폴드빌"에서 "킨샤사"로 바꾸는 등 "자이르화 정책"을 추진했다. 1972년에는 자신의 이름도 "'''모부투 세세 세코'''"로 개명했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마오쩌둥에게 접근했으며, 소련에 적대적인 아프리카 국가들을 지원하는 사파리 클럽과 중국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았다.[121] [122] [123] 중국의 원조로 킨샤사 인민궁전과 스타드 드 마르티르 경기장이 건설되었다.[124] [125] [126] [127] [128] 일본의 원조로 콩고 강에 마타디 다리가 건설되었다. 모부투는 서양식 양복과 넥타이를 금지하고 아바코스트라는 인민복 스타일의 옷을 강요했다.[129] 그는 무아마르 알 카다피를 라이벌로 여겼고, 칼리파 하프타르 등 반카다피 세력을 지원했다.[130] [131] 차드-리비아 분쟁에서는 아프리카 통일 기구 평화 유지군으로 자이르군을 파병하여 이센 하브레를 지원했다.[132] [133] [134]
9. 쇠퇴한 권력과 인기
1990년 5월, 냉전 종식과 국제 정치 환경 변화, 경제 문제 및 국내 불안으로 인해 모부투는 혁명대중운동(MPR)의 권력 독점을 포기하는 데 동의했다. 1990년 5월 초, 자이르 국립대학교 루붐바시 캠퍼스 학생들은 모부투 정권에 항의하며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1990년 5월 11일 밤, '레 휘부'(Les Hiboux, "올빼미들")이라고 불리는 특수 군부대가 마체테와 총검으로 무장하고 캠퍼스에 진입하면서 전력이 차단되었다. 1990년 5월 12일 새벽까지 최소 290명의 학생이 사망했다. 이 학살로 유럽 경제 공동체(현재의 유럽 연합), 미국, 캐나다는 자이르에 대한 모든 비인도적 지원을 중단했고, 이는 서방의 모부투 지지가 끝나는 시점을 알리는 것이었다.
모부투는 "제3공화국"의 취임을 공고하며 혁명대중운동 의장과 국방을 위한 국장으로서 사임하였으나 대통령직은 유지하였다. 그는 대통령 선거는 1992년에, 입법 선거는 1991년 12월 이전에 열릴 예정으로 새로운 헌법을 초안 작성하는 특별 위원회를 세웠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모부투의 성원자들과 야당들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은 정부의 유효성을 방해했고, 1994년까지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낳았다.
미지급 봉급으로 인한 1991년 킨샤사 폭동 이후, 모부투는 야당 인사들을 연립 정부에 참여시켰지만 여전히 보안 서비스와 중요 부처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파벌 분열로 1993년 모부투 찬성 정부와 반대 정부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반모부투 정부는 로랑 몽생고와 민주주의와 사회 진보 연합(UDPS)의 에티엔 치세케디가 이끌었다.
1994년, 모부투는 자신의 맹인 눈을 돌릴 때 자신의 이웃 국가들을 화나게 하였다. 르완다와 우간다는 모부투의 반대와 함께 병력에 가입하였고, 이 군인들은 1997년 5월 17일 자이르로부터 모부투를 몰아내었다.
경제 상황은 여전히 어려웠고, 1994년 두 그룹은 공화국 고등 평의회 – 과도 의회(HCR-PT)로 통합되었다. 모부투는 긴축 재정과 자유 시장 개혁을 주장하는 켄고 와 돈도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 기간 동안 모부투는 건강이 점점 악화되었고, 유럽에서 의료 치료를 받기 위해 여행을 하는 동안 투치족이 자이르 동부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1996년 8월 전립선암을 앓아 스위스 병원에 입원한 무렵부터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자이르 국내 불안 요소였던 동부 국경 부근의 후투와 투치의 민족 분쟁은 마침내 자이르 영내 투치계 최대 세력인 「반야무렌게」의 대규모 봉기로 발전했다. 10월에는 이를 틈타 인민혁명당의 로랑 카빌라가 반정부 세력을 결집하여 콩고 자이르 해방 민주 세력 연합(AFDL)을 결성하고, 투치족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킨샤사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무장 봉기 당시 모부투는 남프랑스에서 요양 중이었으며 1997년 5월까지 귀국하지 않았고, AFDL군은 자이르 전역의 약 4분의 3을 장악했다. AFDL이 킨샤사에 접근하자 자국민 보호를 염두에 두고 미국, 프랑스, 영국 및 UN 등이 조정 작업에 나섰다.
타임은 쿠데타를 모부투의 "심한 파멸 통치"를 끝내는 것으로서 보고하였다. 한번 자신이 대통령의 칭호를 전혀 버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모부투는 그해 9월 7일 모로코에서 자신의 망명 동안 쿠데타가 일어난 지 단 한달 후에 온 전립선암과 이미 앓고 있던 갑상샘암으로 인하여 모로코 라바트에서 사망하였다. 뉴욕 타임스의 사망자 명부에서 쓰여진 대로 "그는 3개의 기둥들에 자신의 정치적 장수를 지었으며 폭력, 교활과 적들을 사는 데 국가 기금들의 이용이었다. 그의 국고와 주요 산업들의 체계적인 약탈은 소문으로는 그를 세계의 가장 부유한 국가 원수들 중의 하나로 만든 공식적 부패의 통치로 묘사하는 데 '''"도둑정치"'''(도적정치)에 탄생을 주었다."고 한다. 그의 사망 후, 모부투가 많은 세월 동안 국민들로부터 자신의 주머니로 우회한 재산은 거의 8억 달러 가까이 견적되었다.
10. 몰락과 망명
모부투는 1990년대 초반, 성원자들과 야당들의 폭력으로 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정부의 유효성이 방해받는 혼란 속에서도 콩고의 지도자로 남았다. 그러나 1994년, 르완다에서 투치족 대량 학살을 지속한 후투족들이 자이르 내 난민 수용소를 세우는 것을 묵인하면서 주변 국가들을 자극했다. 르완다와 우간다는 모부투에 반대하는 세력과 연합했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 당시, 르완다 애국전선이 이끄는 투치족이 전국을 장악하면서, 학살 가해자들을 포함한 수십만 명의 후투족 난민들이 자이르 동부의 난민 캠프로 도망쳤다. 모부투는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을 지원하여 자이르 동부 지역에 군사 및 정치 기지를 설립하도록 허용했고, 이들은 르완다와 자이르에서 투치족을 공격했다. 르완다 정부는 자이르 투치족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여 자이르 동부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996년 11월, 모부투 정부가 투치족에게 자이르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자, 바냐물렌게로 알려진 자이르의 투치족이 반란의 중심이 되었다. 1996년 10월, 로랑 카빌라는 반정부 세력을 결집하여 콩고 자이르 해방 민주 세력 연합(AFDL)을 결성하고, 투치족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킨샤사를 향해 진격했다. 동부 자이르에서 반군은 우간다와 르완다의 지원을 받아 모부투를 전복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고, 로랑데지레 카빌라의 지휘 아래 모부투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과 합류하여 킨샤사를 향해 진군했다. 부룬디와 앙골라도 반란을 지원하면서 제1차 콩고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1996년 8월 전립선암으로 스위스 병원에 입원했던 모부투는 저항을 조직할 수 없었고, 그의 군대는 무너졌다. 반군은 낙후된 국가 기반 시설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전국을 장악했다. 1997년 중반, 카빌라의 군대는 진격을 재개했고, 모부투 군대의 잔여 세력은 거의 저항하지 못했다. 1997년 5월 16일, 푸앵투아르에서 카빌라와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의 평화 회담이 결렬된 후, 모부투는 망명길에 올랐다. 1997년 5월 7일부터 8일까지 가봉에서 열린 “중앙아프리카 불어권 7개국 정상회담”에서 모부투는 건강상의 이유로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5월 16일 킨샤사로 돌아온 모부투는 북부 바드리테에 있는 궁전으로 피신했고, 의회 의장 몽센구오 주교가 이끄는 내각에 권력이 이양되었으며, 모부투는 모든 국정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콩고-자이르 민주화를 위한 민주 세력 동맹(AFDL)으로 알려진 카빌라의 군대는 다음 날 승리를 선포했다. 1997년 5월 23일, 자이르는 콩고민주공화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모부투는 토고로 망명했으나, 며칠 후 그곳을 떠나라는 요구를 받았다. 1997년 5월 23일부터 그는 주로 모로코 라바트에 거주했다. 그는 1997년 9월 7일,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라바트의 기독교인 묘지인 시메티에르 에우로페앵(Cimetière Européen)에 안치되었다.
뉴욕 타임스는 모부투가 폭력, 교활함, 국가 기금 유용이라는 세 가지 기둥 위에 정치적 장수를 구축했으며, 국고와 주요 산업을 체계적으로 약탈하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원수 중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통치는 '''"도둑정치"'''(도적정치)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의 사망 후, 모부투가 국민들로부터 빼돌린 재산은 거의 8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11. 평가와 유산
모부투의 통치 기간 동안 1974년 FIFA 월드컵에서 자이르 축구 국가대표팀은 본선에 진출하여 브라질, 유고슬라비아, 스코틀랜드와 한 조에 편성되었다.[103] 스코틀랜드와의 1차전에서 0:2로 패배한 후, 모부투는 선수단에게 FIFA 지원금이 국가로 돌아갈 것이라고 통보했고, 이에 사기가 떨어진 자이르는 유고슬라비아와의 2차전에서 0:9로 대패했다.[103]
모부투의 국가 권력을 이용한 국민 침탈 행위는 '권력 횡령(kleptocracy)'이라는 용어를 낳았다.[103]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약 50억 달러를 부정 축재했으며, 서아프리카, 브라질, 모로코 등지에 호화 별장과 대저택을 보유하고 검은 돈을 은폐하기 위한 은행 계좌를 마련했다.[103]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모부투가 폭력, 교활함, 국가 자금을 이용한 적 매수라는 세 가지 기둥 위에 장기 집권을 구축했다고 평가했다.[103] 타임(Time (magazine))지는 그를 "전형적인 아프리카 독재자"라고 묘사했다.[11]
모부투는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는데, 가장 보수적인 추산으로도 5천만에서 1억 2천 5백만 달러에 달하며, 일부 자료에서는 1억 5천만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104]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딸 야키의 결혼식에서 잘 드러났는데, 6만 5천 달러짜리 웨딩 케이크, 거대한 불꽃놀이 등이 포함되었다.[58] 얀센은 모부투의 일상을 묘사한 책을 썼는데, 여기에는 하루에 여러 병의 와인, 해외에서 온 수행원들, 호화로운 식사 등이 포함되었다.[58]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는 모부투를 1984년 이후 세 번째로 부패한 지도자이자 같은 기간 동안 가장 부패한 아프리카 지도자로 선정했다.[105]
모부투는 1974년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와 조지 포먼(George Foreman) 간의 정글의 럼블(Rumble in the Jungle) 권투 시합을 유치하여 국제적인 관심과 정당성을 얻고자 했다.[106] 그는 이를 위해 1,000만 달러의 파이트 머니를 지원하고 경기를 개최했다.[106] 또한, 알리-포먼 권투 경기를 위해 건설된 5월 20일 경기장을 자이르 청소년 체육부와 자이르 국민에게 선물했다.[106]
12. 한국과의 관계
12. 1. 대한민국과의 수교
12. 2. 전두환 정권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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